詩와 冊과 版畵 그리고.../冊想

칼의 노래-김훈/생각의 나무

달산(達山)선생 2020. 2. 15. 23:55


칼의 울음

피난민들은 다만 얼굴 가운데 코가 있었기 때문에 죽었다.

그 머리와 코의 숫자로 양측 지휘관들은 승진했고, 장려한 수사로 넘치는

교서를 받았다.


안개 속의 살구꽃

원균은 나를 실은 함거가 어서 떠나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 사내는 모든 전투가 자기 자신을 위한 전투이기를 바랐다. 그는 전투의

결과에 얻을 것이 있다고 믿었다.


다시 세상속으로

그는 이 작전이 조정의 전략이며 도원수의 지시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

다만,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존중해 주십시오, 라고만 대답했다. 반간들로

부터 입수했다는 조정의 정보를 신뢰할 수 없었다.


조정은 작전 전체의 승패보다도 가토의 머리를 간절하게 원했다. 임금은

가토의 머리에걸린 정치적 상징성을 목말라 했다. 나는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정치에 아둔했으나 나의 아둔함이 부

끄럽지는 않았다.


허깨비

길삼봉의 허깨비는 도처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길삼봉은 어디에도 없었다.

헛갈리는 냄새는 짙었으나 자취는 없었다.


임금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죽임으로써 권력의 작동을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헛것은 칼을 받지 않는다. 헛것은 베어지지 않는다.


몸이 살아서

안아보면 어머니는 한 움큼이었다. 어머니의 몸에서는 오래된 아궁이의

냄새가 났다.


나는 임금이 가여웠고, 임금이 무서웠다. 가여움과 무서움이 같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임금은 강한 신하의 힘으로 다른 강한 신하들을 죽여왔다.


서캐

스스로 살아가는 백성들의 생명이 모질고도 신기하게 느껴져, 칼 찬 나는

쑥쓰러웠다.


식은땀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

의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


임금은 강한 신하를 두려워했다.


임금의 사직은 끝없이 목숨을 요구하고 있었고 천하가 임금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김덕령은 용맹했기 때문에 죽었다. 임금은 장수의 용맹이 필요했고 장수의

용맹이 두려웠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

이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

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 주기를 나는 바랐다.


적의 기척

임금은 적이 두려웠고, 그 적과 맞서는 수군 통제사가 두려웠던 모양이다.


일자진

사지에서는 살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아마도 살길이다. 살길과

죽을 길이 다르지 않다.


구덩이

군량은 명량에서 깨어진 적선에 올라가 빼앗은 쌀이었다. 모두가 적들에게

빼앗긴 연안 백성들의 쌀이었다. 내가 적을 죽이면 적은 백성을 죽였고, 적이

나를 죽인다면 백성들은 더 욱 죽어나갈 것이었는데, 그 백성들의 쌀을 뺏고

빼앗아 적과 내가 나누어 먹고 있었다. 나의 적은 백성의 적이었고, 나는 적의

적이었는데, 백성들의 곡식을 나와 나의 적이 먹고 있다.


내 안의 죽음

나는 '면사' 두 글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죄를

사면해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죽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젖냄새

시선의 방향과 눈길을 던지는 각도까지도 아비를 닮고 태어나는 그 씨내림이

나에게는 무서웠다.


누린내와 비린내

싸움은 싸움마다 개별적인 것이어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때마다 그 싸움이

나에게는 모두 첫번째 싸움이었다. 닥쳐올 싸움은 지난간 모든 싸움과 전혀

다른 낯선 싸움이었다. 싸움은 싸울수록 경험되지 않았고,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모든 싸움 앞에서 무효였다.


나으리의 몸이 수군의 몸이옵니다. / 그렇지 않다. 수군의 몸이 나의 몸이다.


물비늘

눈으로 본 것은 모조리 보고하라. 귀로 들은 것도 모조리 보고하라. 본 것과 들

은 것을 구별해서 보고하라. 눈으로 보지 않은 것과 귀로 듣지 않은 것은 일언

반구도 보고하지 말라.


그대의

(아버님, 죽을 때가 무서웠습니다. 칼을 찾아 주십시오.)


무거운 몸

위관의 질문은 답변을 미리 예비하고 있으므로 나는 아무것도 답변할 수 없었다.

위관은 집요했으나, 아무것도 묻고 있지 않았다. 아마도 거기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임금뿐이었다. 임금은 나를 죽여서 사직을 보존하고 싶었을 것이고 나를

살려서 사직을 보존하고 싶었을 것이었다.


나를 죽이면 나를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임금은 나를 풀어준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를 살려준 것은 결국은 적이었다. 살아서, 나는 나를 살려준 적 앞으로 나아갔다.


물들이기

공세 안에 수세가 살아 있지 않음녀 죽는다. 그 반대도 또한 죽는다. 수와 공은

찰나마다 명멸한다.


새칼에, 검명 여덟 글자는 내 필적대로 새겨져 있었다. 다 지워버리고 물들일

염자 한 글자뿐이었더라도 좋았을 뻔했다.


베어지지 않는 것들

강화 협상이 일본과 명사이에 어떻게 돌아가고 잇는 것인지는 남해안 수영에서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조선 조정이 그 협상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

다.


나는 정치적 동기에 의해 출병하는 군대의 실전을 신뢰할 수 없었다.


계사년에 왕릉을 범한 자들을 포로들 중에서 색출해 내라는 유지는 그 허망과

무내용을 완성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국물

강물에는 파도가 없어서, 배는 비단 이부자리를 깔고 나아가는 듯 했다.

봄볕이 이불처럼 따스했다.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사쿠라 꽃잎

적에게 보여줄 아무런 군세도 없었다. 나는 늘 그쪽이 추웠고 시렸으며 적에게 감

지될 내 빈곤이 두려웠다.


더듬이

임금은 멀리서 보채었고, 그 보챔으로써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다.


부하가 죽으면, 그 상급자의 불찰이다. 네가 백성을 온전히 지켰더라면, 어찌 백성이

너에게 총을 쏘았겠느냐?


백골과 백설

적이 전쟁을 끝내기를 원한다면 군대를 거두어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온 국

토를 갈아엎고 돌아가는 적을 온전히 살려서 돌려보낼 것인지, 종자를 박멸해서 시체

로 바다를 덮을 것인지는 적이 아니라 나와 내 함대가 결정할 일이었다.


명과 일본이 강화하는 날, 다시 서울 의금부에 끌려가 베어지는 내 머리의 환영이 떠

올랐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을 수는 없었다. 나는 나의 자연사로서 적의 칼에 죽기를

원했다.


소금

선전관은 사실을 요구하지 않고 해결책을 요구했다.


철수를 서두르는 적정이 다급했으므로, 임금이 나를 죽이게 되는 날은 내가 바다에서

적의 전체를 맞은 이후가 될 것이었다.


서늘한 중심

내 숙사 토방에 걸려 있던 면사첩을 끌어내려 불 아궁이에 던졌다. 나는 결국 자연사

이외의 방식으로는 죽을 수 없었다. 적탄에 쓰러져 죽는 나의 죽음까지도 결국은 자연

사일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적이 물어가버린 빈 바다에서는 죽을 수 없었다. 나는 갈

것이었다.


들리지 않는 사랑노래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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