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冊과 版畵 그리고.../冊想

김훈, 라면을 끓이며...

달산(達山)선생 2019. 10. 27. 22:17


2019.10.13

그 어선들의 반토막 태극기는 살아가는 일의 수고로움과 수고의 경건함을

보여주었다. 남루는 그 경건함이 드러나는 방식이며 외양이었다. 반 토막

태극기는 맹렬하게 펄럭였다. 아름다운 태극기였다. 권세 높은 관청 지붕

에 높이 솟은 태극기보다 이 닳아빠진 반쪽짜리 태극기는 얼마나 순결한가.

입을 벌려서 직업적으로 애국을 말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노동의 수고로움

속에서 애국을 저절로 해풍에 펄럭이고 있었다. (바다 53쪽)


어선들은 남루하고 지저분하지만, 그 무질서한 갑판 위에 필요없는 물건은

한 점도 실려있지 않다. 모든 어로장비와 잡동사니들은 작업의 순서와 인

간 육체의 공학적 기능에 맞춰서 다들 제자리에 정확히 배치되어 있다. 어

선의 헝클어진 모습은 가지런한 무질서이며 시원적 삶의 경건성이다. 어선

은 작업의 내용을 형식적으로 얽매지 않고 무질서한 외양으로 흩어놓는다.

그 노동의 표정은 허술하고도 단단하다. (바다 65쪽)


모든 밥에는 낚시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시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 쪽으로 끌려간다. 저쪽 물가에 낚시

대를 들고 앉아서 나를 건져올리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 자가 바로 나다.

이러니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한다. 밥 쪽으로 끌려가야만 또다시

밥을 벌 수가 있다. (밥1 71쪽)


못은 힘의 크기로 박는 것이 아니라, 힘의 각도로 박는다는 이치를 나는 알

았다. (목수 129쪽)


그들이 노동은 거의 대부분이 밧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략~ 그들

은 지휘자도 없는 오케스트라처럼, 앞에서 당기는 사람과 뒤에서 당기는

사람의 손발이 척척 맞아들어갔다. 중략~ 모든 선원들은 전혀 말이 없는

가운데 다른 동료들의 작업내용을 이해하고 있었다. (줄 133쪽)


한 개인의 횡사는 세계 전체의 무너짐과 맞먹는 것이고, 더구나 그 죽음이

국가의 폭력이나 국가의 의무 불이행으로 비롯된 것이라면 이 세계는 견

딜 수 없는 곳이 되고 말것인데, 이 개별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체제가 전체

주의이다. 이 개별적 고통에 대한 공감이 없다면 어떤 아름다운 말도 위안

이 되지 못하고 경제로 겁을 주어도 탈상은 되지 않는다.(세월호 176쪽)


세상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위선일 때가 많다. (러브 203쪽)


굳은 살은 각질로 금이 가 있고, 거기에 때가 끼어 있기도 하지만, 나는 사람

이나 개의 몸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은 발바닥의 굳은

살이라고 생각한다. (손1 274쪽)


"개를 때리면 때려도 말 안듣는 개가 된가"고 그는 말했다. 더구나 새끼들이

보는 앞에서 어미개를 때리면 어미의 권위가 무너져서 새끼들을 사냥개로

길러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산속에서는 사람도 오판할 수 있고 개도 오판할

수가 있으므로 서로의 오판을 긍정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발1 287쪽)


무기는 전쟁의 도구이고 농기구는 평화의 도구이다. 이 모순된 운명의 도구들

은 같은 화덕에서 태어나고, 쇠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쇠 339쪽)


하나됨을 잃지 않고 셋을 이루는 세상이 좋은 세상일 것이다. (셋 352쪽)


새들의 둥지는 헐겁고 가벼워서 비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나무와 함께 흔들리

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중략~ 자연을 거스르는 것들의

강력함은 그 외형과 구조의 견고함에 의지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그 강력

함은 허약함을 내장하고 있지만, 이 내장된 허약함은 눈에 보이지 않고, 일이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거대한 허약함을 드러낸다. (까치 355쪽)



베트남 호치민에서 두번째 읽다. 2019.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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